서점에서 1900년대 금강산 유람후 남긴 유람기 또는 산행기를 실은 책자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 선조들이 남긴 산행기들은 대동소이하여 바쁜 이라면 한권만 읽어도 족할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 역시 금강산의 경치를 보고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궁극적으로 보고자 함은 경치너머에 있는 고매한 '도'의 세계, '유불선'의 고양된 경지이다.
한편, 그들의 글투 역시 오늘날 우리가 읽기엔 이물감이 적지 않아 감정이입에 걸림돌이 된다.
그들이 남긴 명문들 그러니까 금강산유기. 백두산등척기. 산정만리 등은 그렇게 정서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고 맗해도 그리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노르베르트 베베라는 독일 수도사가 1925년 금강산을 찾아 남긴 기록이다.
백에 99명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엊그제 출간한 따끈따끈한 책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놀라웁게도,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 홈피에서건 단행본 책자에서건 남기는 산행기의 전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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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산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들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 아닌가.
어쩌다가 산행기에 한시가 언급되기도 하지만, 아마 이는 우리가 서양문학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일 것이다.
우리는 선조들과 비슷한 외양을 띠고 산을 찾지만, 그 의도는 전혀 다름을 이 책에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중언하지만, 근대 산악운동의 정체성은 단순히 등산행위가 아니라 등산 의도에 있다.
따라서, 이는 허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산삼이라면 모를까, 오래되었다고 꼭 좋은건 아니다. 자생적인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의 근대 알피니즘은 자생적이지 않고, 일제를 거쳐 이식된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한국 등산사를 연구하려면 일본 산악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의견이 나뉘고 전개되어 왔는지.....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곧 절판될 것 같다.
그들 역시 금강산을 엄청나게 찾았을 텐데 그들의 금강산 유람기를 읽어보지 못했다.
이외수처럼 처녀 불알 한가마를 걸겠다. (이외수씨 이런말 하면 재미있을까?)
*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피는 한국인이되 한국인이라는 의식은 별 없고 러시아사람이라고 자부한다는 말을 듣고 홀가분해진 날.
출판사 서평
지금으로부터 75년 전(1925년), 독일의 베네딕트 수도사 노르베르트 베버가 열흘 간의 금강산 여행을 마친 후 쓴 여행기. 먼저 산에 오른 사람들의 글이나 여러 입소문을 통해서 보고 들은 금강산의 비경에 대한 찬사로 많은 기대를 안고 떠난 여행길이었다.
제물포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가서 다시 전차로 갈아타고 1시간쯤 지나 자동차로 갈아타고서는 험준한 길을 따라 우여곡절 끝에 장안사에 도착한다. 내금강의 장안사에서출발하는 그의 금강산 여행은 신금강을 거쳐 외금강, 해금강(망군대, 마하연, 묘길상, 유점사, 신계사, 해금강,비로봉 등)까지 열흘(6월 2일∼6월 12일)에 걸친 일정이었다. 짚신을 신고 오르내리는 그는 때로는 뱀에 물릴뻔하고 때로는 장기간의 산행으로 무릎의 통증을 느끼면서도 억척스럽게 금강산 비경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닌다.
'신비로운 불교 세계와 자연의 비경이 잘 어우러진 금강산 산행은 내게는 간절한 바람이었다'라는 그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는 여행 중에 접하게 되는 자연 풍광과 우리나라 산이라면 으레 있기 마련인 사찰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에 대한 생각들을 담고 있다.
베버는 본국에 돌아온 다음 해인 1927년 정월 초에 독일어판으로 남부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성 오틸리엔 베데딕트 수도원에서 이 책을 출판하였다.
금강산을 여행한 다른 서양인들도 베버와 마찬가지로 금강산의 비경과 불교 사찰에 대해 기록하였다. 베버에 앞서 금강산을 여행한 지리학자 비숍(18]4년), 영국 부영사 캠빨1883년), 학자이자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1889년), 영국인 기자 해밀턴(1903년) 등도 그랬다.
그들은 산수 경관의 경이로움에는 하나같이 감탄하고 있으나 금강산에서 접하는 불교 문화에 대한 이해는 사람에 따라 천지 차이였다. 예를 들어 캠벨이나 비숍은'절의 무식한 숭려들이 뜻도 모르면서 불경을 중얼거린다'라고 묘사한 데 반해 해밀턴이나 게일은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찾아 기록하고 오래된 종교에 대해 미학적 표현올 아껴지 않았다.
베버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본다.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열린 시각이다. '황홀한 비경은 조물주에 의해,또한 경건한 침묵과 신비의 언어에 싸인 채 깊은 산사에서 독거(獨居)하는 스님들에 의해 너무도 조화를 잘이루고 있다' 한 천주교 수도사가 찾은 금강산은 하느님의 창조물 중에서도 으뜸가는 금강산 절경 속에 조선 불교의 성지인 사찰이 겸비하기에 더욱더 아름답고 성스러웠던 것이다. 억불 정책으로 초라해진 스님들의 면모나 외세 침입 등의 이유로 소실된 절터 등을 이야기하는 그는 이국의 수도사라 볼 수 없을 겅도의 폭넓은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애정어린 입장에서 쓰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속의 불교 성전을 보길 바라며 산행을 했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교적·인종적·문화적 편견을 뛰어넘는소박하면서도 객관적 관찰자로서 금강산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려 했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그은 나치 독일군들의 압류를 피하기 위해서 한국에서의 그림과 사진, 글이 담긴 원고를 모두 벽 속에 숨겨두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베버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 수도원을 공사하다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2005년 10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는
독일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독일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데다가
귀국 후에는 수년 째 분도출판사 책임자로 일하며 1년에
한두 차례 다녀올 정도여서 독일과 한국간 왕래는 매우 친숙했다.
그렇지만 이날 만큼은 비행하는 12시간 동안 한시도 좌석을 떠나지
못할 정도로 긴장이 되었고 간이 콩알만하게 오그라들 정도로
조마조마 했으며 좌불안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 신부는
조선 후기의 대표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화첩을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돌려받아 오는 참이었다. …
이상은 월간 문화재사랑 9월호 기사 중 일부 (웹 주소-아래 참조) 인용이다.
http://cha.korea.kr/gonews/branch.do?act=detailView&dataId=155372147§ionId=add_cate_1_sec_1&type=news&currPage=1&flComment=1&flReply=0
선 신부가 가지고 온 화첩은 겸재 그림이 21점이나 실린 국보급이었다.
당연히 보험에 들어야 하지만 보험료만 5억이라고 하여 하느님 믿으며
그냥 비행기에 들고 탈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신부(神父)가 된 분이지만 ‘간이 콩알 만하게’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겸재 화첩이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 가게 된 경위
1911년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가 선교하러
조선에 왔다. 베버는 조선의 문화와 풍습에도 흥미를 느끼며 여기 저기 돌아 다닌다.
1925년 베버는 금강산을 구경하고, 1927년 “금강산에서 (In den Diamantenbergen
Koreas” 라는 책을 낸다. (1999년 “수도사와 금강산(푸른숲)”으로 번역 출판)
이 베버의 금강산 여행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이 겸재 그림 21점을 구입하여
선물로 주었는데, 이것을 그 뒤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1974년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유 교수는 베버의 “금강산에서 (In den Diamantenbergen)” 를 읽다가
겸재 그림을 보게 된다. 이를 확인하러 오틸리엔 수도원을 찾아갔다가
“겸재화첩’ 진본을 만나게 된다.
1977년 유 교수는 (*)글을 발표하고 이후 국내에서도
독일에까지 겸재 그림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독일에 있는 겸재의 회화,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는 수장 화첩의 첫 공개.
겸재화첩 반환
그 뒤 한국에서 이사람 저사람 오틸리엔 수도원을 찾아 가면서
수도원도 화첩의 가치를 깨닫는다. 한국인들이야 당연히 귀중한
겸재 그림이 머나먼 독일 땅에 있는 것이 안타까웠을 것이고
어떻게 돌려 받을 수 없나 궁리하기 시작한다.
마침 선지훈 신부의 친구 슈뢰더 신부가 오틸리엔 수도원장이 되지만
문화재 반환 같이 중요한 일이 개인의 친분에 좌우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 세계 미술계가 “겸재’를 평가하기 시작한다.
미국 덴버 미술관 미술학자 케이 블랙이 ‘숨막힐 듯한 걸작’이라며
겸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세계적 경매회사인 뉴욕의 크리스티 는
화첩을 경매에 부치자고 오틸리엔 수도원을 조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눈독’이 오히려 “겸재화첩’ 반환에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돈으로써 거래한다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긴 수도원이 경매회사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였던 것이다.
…2009년은 오틸리엔 수도원이 한국에 진출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니,
이를 기념하는 특별 행사로 <겸재화첩>의 반환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
고 강력히 호소하는 왜관수도원과 선지훈 신부의 설득도
오틸리엔 수도원의 <겸재화첩> 반환 결정에 결정타가 되었다.
선지훈 신부는 “겸재화첩 반환이라는 쾌거의 일등 공신은 오틸리엔
수도원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 역시
“문화재는 원소유국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다는 소신을 가지고
반환을 결정한 수도원의 태도에 무척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오틸리엔 수도원 신부 12명으로 이루어진 협의회는 영구 임대 형식의
<겸재화첩> 반환을 만장일치로 추인하였다.-월간문화재 사랑 9월호 인용
돌아온 문화재 보관
독일 수도원이 감격스럽게도 돌려 준 것을 선지훈 신부가 간을 졸여가며
받아 가지고 왔지만 어떻게 보관할 것이냐는 문제에 부딪친다.
2007년 4월 왜관수도원에 누전으로 불이 난다. 천신만고로 돌려 받은
보물을 홀랑 태울 뻔 하다가 다행히 ‘겸재화첩’은 건져낸다.
2009년 화재복구를 끝낸 왜관수도원이 ‘역사전시실’을 마련하고 화첩을
보관한다는데, 필자가 가 보진 않았지만 전문 전시 공간이 아닌 모양이다.
칠곡군과 “겸재화첩”을 전시공간 문제를 의논하는데 예산확보가 쉽지 않다고 한다.
결국 돈 문제다.
우리나라에 돈이 없다면 그거야 어떻게 하겠느냐 만
지금 나라 전체적으로는 돈이 남아 돌지 않는가?
가끔 이상한 소리 턱턱 해서 사람 가슴에 대못을 박는 어떤 교회들은
웅장한 성전을 잘도 짓지만, 같은 하느님, 그리스도를 믿어도
교파와 교단이 다르니 나누어 줄 리가 없다.
참 이런 것들이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약탈해 간 조선왕조의궤 !
우리 고속철 결정을 앞두고 환심 사려고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까지 나서서
돌려 줄 것 같이 하다가 입찰 끝나니 오리발을 내밀고 아직 버티는데,
이들 변명 중에 자기네가 더 잘 보관한다 라는 것이 있다.
참 얄밉지만 더 분통이 터지는 것은 이게 실은 일리가 있다 는 점이다.
당시 의궤를 돌려 받았다면 보관할 기관은 규장각인데 그 때 형편으로는
귀중한 문화재를 돌려 받았습니다 하고 자랑 한 번 하고는 바로 비좁은
창고 안에 상자 채로 쳐 박아 놓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몇 년 전 확충해서 조금 나아 졌지만, 아직도 파리 국립도서관 환경에
못 미친다고 한다. 의궤 반환 교섭에 나섰던 인사에게 들은 말로는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혹시 프랑스에서 엉망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걸 공격하려고) 질문 받았지만 그쪽으로는 이야기가 안됩니다
하고 대답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우리보다 낫다고는 차마 할 수 없고)
겸재 모사전이 오늘-9월 22일부터 10월 31일 까지
강서문화원 겸재 정선 기념관에서 열린다.
사진: 겸재 진경산수화 모사전-강서문화원
겸재 기념관이란 최근 강서구청-강서문화원이 궁산 공원 앞 한강 변에
지은 것인데 건물이 상당히 그럴 듯 하다. 그런데 정작 겸재 그림은 없다.
하긴 겸재 그림 진본은 모두 간송, 삼성미술관, 국립 중앙 박물관
아니면 몇몇 개인이 가지고 있는데 결코 작품을 내 놓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판에 겸재는 250년 전 죽고 없어 더 생산을 못하니 어디서 구하겠는가?
겸재 기념관은 지었지만 겸재 그림은 없으니 겸재를 모사(模寫)한 그림을
전시할 수 밖에 없어 마련한 것이 위 모사품 전시회다.
이렇게 겸재 그림 없는 곳은 건물을 짓고, 정작 가진 곳은 전시할 공간이
없으니 어쩐지 바보 나라에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엉뚱하게 강서구청 비웃는 듯이 이야기가 흘렀지만 강서구는 나름대로
또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칠곡에 겸재 그림 전시공간 마련은
아무래도 중앙정부 지원이 필요한 것 같다.
대운하 운운 하다가 4대강 정비로 말 바꾼 사업
예산 만 분지 일이면 거뜬히 해결할 텐데…
9월 8일부터 11월 22일까지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겸재 250주년
기념전에 이 왜관 수도원본이 전시되는데, 화첩 형태라 21점을
한꺼번에 공개할 수 없어 매일 한 장씩 넘기며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함흥본궁송(咸興本宮松)
비단에 엷은색, 28.8x23.3cm, 왜관수도원
건물 위로 한참 자란 소나무가 화면 가득 그려져 있다.
가지가 아래로 늘어진 노송인데, 가운데 부분을 희게 남겨 두어
둥근 입체감을 나타낸다.
왼쪽 상단에 겸로필력수건 비신조하작능차(謙老筆力雖健 非神助何作能此)
라고 쓰여 있으니 겸재 노인의 필력이 건실하다고는 하나 신의 도움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가 있었겠는가 ! 라는 뜻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향 함흥의 본궁(咸興本宮)에 있던 소나무를 그렸다.
본궁과 소나무는 실재로 있었지만 그림은 얘기만 듣고 그렸다고 한다.
이 함흥본궁 소나무를 그린 겸재 그림으로는 왜관수도원 화첩이 유일하다.
연광정(練光亭)
비단에 엷은색, 28.6x23.9cm, 왜관수도원
연광정(練光亭)은 평양 대동강변에 있는 경치 좋기로 유명한 정자인데
대동강을 오른 편에 두고 그렸다.
상단 중앙에 연광정 겸재(練光亭 謙齋)라고 관서한 왼 쪽에
해동제일승 제일필 (海東第一勝 第一筆) 이라는 묵서가 있으니,
조선 제일의 경치를 최고의 솜씨로 그렸다는 뜻이다.
사진: 연광정-인터넷에서
이번 토요일-9월 26일 KBS 역사 스페셜에서 독일에서
겸재화첩을 찾아 온 이야기를 내 보낸다니 많이 시청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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