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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은 하산중 일행중 4명이 추락사함으로써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등산에 대한 비난과 함께 등반금지론까지 대두하였다는데, 과연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등반금지론이 근대 알피니즘을 보는 좋은 프레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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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로 어느나라에서 금지론이 대두하였을까요?
영국? 아니면 마터호른 알프스 현지.
죽은 사람들은 현지 가이드들입니다. 따라서 금지론이 어디에서 대두되었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30년대 낭가파르바트 독일대 대참사후 독일에서는 어떠했을까요?
1980년대 한국대 마나슬루 대참사후 한국에서는 어떠했을까요?
만약 이런 예가 그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가 네팔원정하였을 경우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2. 중요한 것은 왜 금지하려 들었을까요?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당시 시대상황과 이 사건의 파급효과에 대한 자료가 미비하기에, 비견한 예를 들어 봅니다.
만약에 스위스 레만호수에서 배를 타고 놀다가 4명이 익사하였다고 하면 수영금지론이 대두했을까요?
만약에 탐험갔다가 4명, 아니 40명이 실종되었다고 하면 탐험금지론이 야기되었을까요?
만약에 전쟁이 발발하여 4000명이 전사했다고 하면 종전론이 팽배할까요?
제 생각은 아니다 입니다.
레만호수에서 배를 타고 놀다가 선체결함 또는 운전미숙으로 인해 익사하였다 해도 '그날의 사건사고란'에 실릴뿐. 수영금지론은 없을겁니다.
왜냐하면, 지가 재미있게 놀다가 물에 빠진 거니까요.
탐험갔다가 40명이 실종되었다고 해서 금지론? 아닐겁니다.
훨씬 전이지만, 16세기 17세기 향신료 무역때 10척의 선단이 출발하여 1척만 돌아와도 대박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탐험은 돈벌러 가는 것이고, 떼돈 벌려고 하다가 죽은 것은 그렇게 낯선 모습이 아니니까요.
전쟁이 발발하여 4000명이 죽었다고 해서 국민들은 꿈쩍도 안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개인이 목숨을 버려도 좋을 명분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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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알피니즘이라고 하는 것의 외양이
'수영처럼 재미있게 노는 여가생활하는 것 같지도 않고.
탐험처럼 돈벌러 오지로 가는 것도 아니고,
전쟁처럼 명분이나 당위성이 있는 것도 아닌걸로 보였던 터라 등산 금지론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근대 알피니즘은 수영도 아니고 탐험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라는 거.
재미있게 노는 것. 돈버는 것 아니고. 개인차원의 명분 너머에는 거창한 게 없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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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의 의미는 대단합니다.
현대 등반사에서 단 하나의 이정표를 꼽아야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에드워드 윔퍼(1840~1911)의 마터호른 초등(1865년)이다.(심산)
에드워드 윔퍼가 “세계는 나의 발 아래에 있다”고 기쁨을 표시했던 마터호른 초등은알프스 황금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이용대)
이것이 알피니즘사의 정설입니다.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씌여지는 겁니다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의문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윔퍼 일행은 하산 도중 등산사상 가장 충격적인 조난사고를 당한다. 7명을 연결했던 로프가 낙석에 맞아 끊어져 일행 중 4명이 1200m 아래의 마터호른 빙하로 추락사한다. 이 사고로 당시 세상 사람들은 인명사고를 내는 등산에 대하여 비난의 소리를 높였으며 등반 금지론까지 대두하였다.
원문을 읽으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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윔퍼는 황금시대,머메리는 은시대 톱스타윔퍼는 黃金시대, 머메리는 銀시대 톱스타 글 이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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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드워드 윔퍼 알프스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에드워드 윔퍼는 5년 동안 8번의 등반을 집요하게 감행한 후에야 마터호른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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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프스 은의 시대를 이끈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의 저서. 근대 산악 문학의 명작으로 1994년 수문출판사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
알프스 몽블랑 등정으로 시작된 근대등산은 사람들의 정복심리를 자극했고, 알프스의 여러 고봉으로 시선이 돌려지면서 미답봉들이 하나 둘씩 등정된다. 몽블랑이 등정되면서 알프스에서 당연히 주목을 받게 된 산은 알프스 제2의 고봉인 몬테로자(Monte Rosa)였다.
이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푼타 조르다니(Punta Jordani·4055m)가 1801년에 조르다니(Jordani)에 의해 초등된다.
1811년에는 베르네 알프스의 융프라우(Jungfrau·4167m)가 마이어(Meyer)형제에 의해 초등되었으며 1850년에는 동부 알프스에서 유일하게 4000m가 넘는 피츠베르니나(Pizbernina·4052m)가 장 꼬지(J. Coaz)에 의해 등정된다.
1854년 난공불락으로 여겨왔던 베터호른(Wetterhorn·3701m)의 등정으로 시작한 알프스의 황금기는 1865년 4000m 봉우리 가운데 최후의 난봉이던 마터호른(Matterhorn·4477m)의 등정으로 일단 그 막을 내리지만 10여년 동안에 무려 60개가 넘는 4000m 높이의 고봉들이 모두 등정된다. 세계 등산사에서는 이 기간을 이른바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알프스에서 이루어진 초등정은 아주 풍성하다. 1854년 영국의 알프레드 월스(Alfred wills)가 베터호른을 초등하면서 황금시대가 열린다.
이어 1855년 몬테로자의 최고봉 뒤퍼 슈비체(Dufour spitze·4634m)가 찰스 허드슨(Charles Hudson)과 스마이드(Smyth)에 의해 등정되었으며 1857년에는 묀히(M nch·4099m), 1858년에는 아이거(Eiger·3970m), 1859년에는 알레치호른(Alestschhorn·4195m), 1860년에는 그랑 파라디소(Grand paradiso·4061m), 1861년에는 봐이쓰호른(Weisshorn·4505m), 1865년에는 그랑드 조라스(Grand Jorasses·4208m) 서봉과 에끼위 베르뜨(Aiguille Verte)가 윔퍼와 가이드인 끄로와 알머 등에 의해 차례로 초등된다.
또한 알프스 4000m 급의 봉우리 중 마지막 난봉으로 남겨져 있던 마터호른(Matterhorn·4477m)이 1865년 7월 14일에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 찰스 허드슨(Charles Hudson), 프랜시스 더글러스(Lord Francis Douglas), 더글라스 해도우(Douglas Hadow)와 가이드 미쉘 끄로(Michel Croz), 페터 타오그발더(Peter Taugwalder) 부자 등에 의해 초등된다.
당시 영국의 에드워드 윔퍼는 5년 동안 8번의 집요한 등반을 시도한 끝에 정상에 서서 “세계는 나의 발 아래에 있다”고 기쁨의 함성을 보냈으니 이 등정은 황금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윔퍼 일행은 하산 도중 등산사상 가장 충격적인 조난사고를 당한다. 7명을 연결했던 로프가 낙석에 맞아 끊어져 일행 중 4명이 1200m 아래의 마터호른 빙하로 추락사한다. 이 사고로 당시 세상 사람들은 인명사고를 내는 등산에 대하여 비난의 소리를 높였으며 등반 금지론까지 대두하였다.
한편, 윔퍼의 등정 이틀 뒤인 7월 16일에는 장 안뚜안느 까렐(Jean Autoine Carrel) 일행이 이태리 등반대를 이끌고 이태리 능선을 통해 마터호른에 두 번째로 올라 초등정의 영예를 놓친다. 마터호른의 등정으로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고 등산의 ‘은시대(Silver age)’가 열린다.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를 이끈 영국
기록에 의하면 1859년에서 1865년 사이에 149개의 알프스 고봉이 초등정되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에 성공해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부(富)를 누리는 전성기를 맞는다. 이를 배경으로 알프스에 진출한 영국인들의 활약상은 오늘날의 등산 선진국의 기틀을 다진다.
19세기말까지 초등정된 알프스 50개 봉우리 가운데 그 절반이 영국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황금시대의 시작과 끝맺음 모두가 영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만 보아도 알프스에서 그들의 활동이 얼마나 왕성했는가를 알 수 있다.
경제적인 국력을 배경으로 알프스의 미답봉을 섭렵하던 영국은 1857년 12월 22일 세계 최초의 산악회인 알파인 클럽(Alpine Club)을 창립한다. 이들은 산악회 명칭에 영국이라는 국명을 넣지 않고 알파인 클럽이라고만 통용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등산은 곧 영국이며 알파인 클럽은 영국 고유의 유일한 것이다’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또한 영국은 황금기를 개막시킨 베터호른 초등정의 성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등정일인 9월 17일을 ‘근대등산의 창립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알파인 클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감 을 1863년에 창간하여 오늘날까지 발행하고 있다. 이 연보는 처음엔 란 제호로 1859년부터 발간해 왔는데 후에 제호를 바꾸었다.
영국 산악회에 뒤이어 1862년에는 오스트리아 산악회(Osterreicher Alpin Klub, 약칭 OAC)가, 1863년에는 스위스(Sehweizer Alpen Club, SAC)와 이태리 산악회(Club Alpino Italino, CAI)가, 1869년에는 독일 산악회(Deutscher Alpenverein, DAV), 1874년에는 프랑스 산악회 등 유럽 열강들이 하나 둘 산악회를 창립한다. 19세기 알프스에서 수많은 초등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이들 각국의 산악회들이 경쟁적으로 산악활동을 벌인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다.
또한 황금시대는 등반 가이드(Guide)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시기다. 그린델발트, 체르마트, 샤모니 등지의 등산기지가 되는 마을에는 당대를 풍미하던 쟁쟁한 가이드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가이드들은 손님을 위해 하나에서 열까지 등산에 필요한 기술과 노력을 제공했으며, 모든 알프스 지역에서 수많은 명가이드들이 배출되었으니 이들의 풍부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알피니즘은 한층 활기를 띠고 발전한다.
등산 가이드들의 활약은 18세기 후반에 드 소쉬르가 몽블랑 등정자에게 상금을 걸었을 때부터 있었지만 초기 가이드들의 활동은 미진했다. 그러나 알프스 황금기에 이르러서는 알프스의 수많은 4000m 급 고봉들의 초등정이 이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이루어낼 수 없을 정도로 활발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도 가이드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등반을 하는 가이드레스 등반(Guideless climbing)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다. 1857년 영국의 허드슨(Hudson), 케네디(E. S. Kennedy), 에인슬리(Ainsli), 스마이드(Smyth) 형제 등이 가이드레스 등반의 첫문을 연다. 이들은 크라인 마터호른((Klein Matterhorn), 브라이트호른(Breithorn), 몽블랑 등에서 가이드레스 등반을 성공시킨다.
이들이 이루어낸 등반은 가이드레스 등반의 효시로 기록된다. 이후, 은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가이드레스 등반이 새로운 등반사조(머메리즘)를 바탕으로 더욱 성행한다. 이런 사조는 오늘날 히말라야에서 행해지는 셀파레스 등반에 채용되고 있다.
새로운 등반방식 나타난 은의 시대
영국에서의 등산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부유 계층의 것이었기 때문에 돈으로 알프스 가이드들을 쉽게 고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등산은 대중적이고 중산 계급과 학생들의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가이드를 고용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필연적으로 가이드 없는 등반이 발달하게 되었고 또한 이런 결과는 단독등반을 성행하게 했다.
당시 루드빅 푸르첼러(Ludwig Purtscheller)와 에밀 치그몬디(Emile Zigmondy), 오토 치그몬디(Otto Zigmondy)형제는 당대를 대표할만한 가이드레스 등반을 실천한 산악인이자 단독 등반가였다. 푸르첼러는 그의 생애 동안 1700좌에 이르는 등반 활동을 했다. 에밀 치그몬디는 1885년 도피네(Dauphine)의 라메이쥬(Lameije·3983m) 남벽에서 추락사한다.
그의 죽음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이 일로 가이드레스 등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한다. 그가 남긴 <등산의 위험(Hazards in Mountaineering)>은 널리 애독되었으며 후일 빌헤름 폴케(Wilhelm Paulcke)가 증보판으로 출간하여 널리 보급된다.
당시 유명했던 단독 등반가로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오스트리아의 게오르 빈클러(Georg Winkler)를 꼽을 수 있다. 그의 활동은 대담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1888년 8월 바이스호른(Weisshorn)에서 추락사했으며, 그의 시체는 그로부터 68년 후인 1956년 빙하 하류의 얼음 속에서 19세 소년의 모습으로 발견된다.
은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알피니즘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그 동안의 등산은 안전하고 쉬운 루트를 통해서 오직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등산 풍조였는데 은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등산은 ‘더 어려운 등로를 통해서 오르는 새로운 등산방식’에 관심이 집중된다. 이것이야말로 은의 시대를 대표하는 주된 풍조가 된다.
1881년 샤모니 침봉 중에 가장 어려운 봉우리인 에귀유 드 그레뽕(Aiguille de Grepon·3489m)을 초등한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에 의해 제창된 머메리즘(Mummerism)은 새로운 등반사조로 등장한다.
이 새로운 등반사조는 등산을 능선에서 벽으로 오르는 등반방법의 전환을 가져오게 했으며, 그것은 벽등반 시대의 개막을 예고한다.
황금시대의 스타가 에드워드 윔퍼였다면, 은의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는 머메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산에서 한계를 극복하는 순수 스포츠 등반을 중시했다. 당시 많은 등산가들이 등정주의(Peak Hunting)의 등반에 급급할 때 그는 ‘더 험난한 루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를 통해서 정상에 올랐으며, 자신이 제창한 머메리즘이라는 방식의 등반을 몸소 실천했다.
그가 제창한 머메리즘은 오늘날의 등반에까지 영향을 미쳐 암·빙벽등반의 행동규범이 되고 있다. 오늘날 그를 가리켜 근대등반의 비조(鼻祖)라 부르게 된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머메리즘의 탄생은 알피니즘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그의 등산 정신은 1세기 이후 헤르만불과 메스너에게까지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시대를 대표한 그의 주요 등반연보를 살펴보면, 1879년 마터호른 즈무트능선(Zmutt Grat)을 23세의 나이에 초등하고, 뒤이어 1880년에는 에귀유 뒤 샤르모(Aiguille du Charmoz)를, 1881년에는 샤모니 침봉 가운데 가장 어려운 봉우리인 에귀유 드 그레뽕을 가이드레스 등반하여 암벽등반의 새로운 기준을 확립시켰으며 이 봉의 등정으로 머메리즘이 탄생한다.
현대의 알피니즘을 지배하고 있는 머메리즘
1880년에 등반된 마터호른의 부르켄 능선 루트는 1911년 이태리가 재등할 때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알프스 최난의 루트로 평가되고 있다.
1895년 그가 낭가파르밧에서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남긴 불후의 명작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My Climbs in Alps and Caucasus)>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등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정상에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
그가 제창하고 몸소 실천해왔던 머메리즘은 이 저작과 함께 영원히 살아 현대의 알피니즘을 지배하고 있다. 그가 남긴 저서는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Scramble Amongst the Alps)>와 더불어 산악 문학의 고전으로 불멸의 명저로 남아있다. 은의 시대를 대표하는 주요 등반기록을 살펴보면, 1868년 그랑드 조라스(Grandes Jorasses) 동봉이 호레이스 워커(Horace Walker)와 유명 가이드인 멜히오르 안더렉그(Melchior Anderegg)에 의해 초등반되었으며, 1871년에는 영국여성산악회 회장을 지낸 루시 워커(Lucy Walker)에 의해 여성 최초로 마터호른이 등정된다.
1882년에는 빗토리오 셀라(Vittorio Sella)가 마터호른 동계 등반에 성공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당뒤제앙(Dent du Geant·4013m) 쌍두봉 중의 하나를 알렉산드로 셀라(Alessandro Sella) 형제가 등정하였으며, 뒤이어 8월에는 그레이엄(Graham)에 의해 이 쌍두봉의 가장 높은 봉을 등정하여 등산의 은시대(Silver age)를 마감한다. 당뒤제앙은 일찍이 머메리가 “정당한 방법으로 오를 수 없는(inaccessible by fair means) 곳”이라고 선언했던 봉우리다. 셀라 형제는 케이블과 로프를 이용해서 이곳에 올랐는데, 이후 등반에서 ‘정당한 방법(fair means)’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남겼다.
은의 시대는 1865년 마터호른 첫 등정이후부터 1882년 당뒤제앙의 초등정까지 17년 동안을 말하며, 다음에 도래될 철의 시대(북벽 시대)와 가교역할을 한다.
물론 이런 기간의 구분은 편의적인 것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더 힘들고 어려운 길로 오르는 본격적인 암벽등반이 시작되었으며, 가이드의 안내 없이 하는 등반이 성행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실천한 사람이 머메리였다. 은의 시대는 머메리의 시대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만치 이 시기는 그가 제창한 신 등정주의가 개화했던 시대다. (계속)
최초의 등산용구 아이스피켈
피켈(Pickel)은 등산용구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피켈이 개발된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유럽 알프스의 4000m 급 산들이 잇달아 초등되기 시작한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이전엔 근대등산의 여명기로 거의 장비를 쓰지 않고 산에 올랐다. 등산용구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황금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자연히 눈과 얼음이 덮인 까다로운 산에 오르자면 눈과 얼음을 찍어 몸을 지탱해야할 용구의 필요했다.
나무를 자를 때 쓰는 도끼(Axe)로 얼음을 깎아 발판을 만들었고 몸을 지탱하고 빙하의 크레바스를 탐색하기 위해 지팡이(Alpen stock)를 사용해야 했다.
도끼와 지팡이가 별개의 용구로 쓰이던 시대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이 두 가지 용구를 하나로 결합하려는 착상이 피켈을 탄생시키게 된 동기였다. 이 아이디어는 산을 직업으로 삼는 샤모니의 등산가이드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등산용 지팡이와 머리 부분에 도끼(Axe)가 처음 고정되어 만들어진 것은 1854년 알프레드 윌스(Alfred Wills)가 베터호른을 초등할 때였다. 이 때 윌스가 고용한 베르너 오벌란드(Berner overland)의 한 가이드가 도끼와 지팡이가 결합된 새로운 피켈을 만들어 가지고 등산에 참여했다.
윌스가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이들이 가져온 도끼 겸용 지팡이는 설산에 쓰기 좋도록 만들어진 용구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용구는 4피트 정도 길이와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그 끝에는 강철로 된 피크와 다른 한쪽 끝에는 4인치 정도의 무거운 철로 된 머리를 붙여 한쪽은 유리를 자르는 칼날 같은 모양으로 얼음을 깎기 위해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또한 얼음을 깎는 부분은 현재 블레이드(Blade)처럼 수평이 아니었으며 샤프트(Shaft)와 평행이 되도록 수직을 이루고 있어 큰 도끼 모양이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은 윌스가 1856년 펴낸 <알프스의 방랑(Wanderings Among the High Alps)>에 자세하게 남겨져 있다.
앳즈(Adze)가 수직의 형태에서 수평의 모습으로 발전된 것은 윔퍼의 마터호른 등정 무렵부터였다. 1865년 마터호른을 등정시 윔퍼가 사용한 피켈은 유명한 가이드로 활약하던 멜히호르(Molchior Andregg)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피크과 앳즈를 불에 달구어서 만든 단조품으로 자루 끝에 스파이크(Spike)를 달았으며 무게는 1.8킬로그램이었다. 오늘날 사용하는 피켈보다 두 배가 넘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피켈의 기본 기능은 알프스 황금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피켈의 형태가 점차 세련된 모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황금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이 시기에 개발된 몇몇 용구는 당시의 형태를 한 세기 이상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도 있다.
비극은 당일 하산 길에서 벌어진다. 윔퍼 일행들을 하나로 묶었던 자일이 낙석에 의하여 끊어지는 바람에 그들 중 4명이 1,200m 아래의 빙하까지 추락하여 사망한 것이다. 등반사에서 ‘마터호른의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이 사건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사람들은 마터호른 초등을 찬양하기보다는 무모한 짓을 하여 사람을 4명이나 죽게 만들었다면서 윔퍼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윔퍼는 사고경위서를 제출하고 법정에 출두해야 했으며 판결과는 무관하게 끔찍한 여론재판에 시달려야 했다. 그 모든 과정들이 당시 25세의 앳된 청년에게는 몹시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윔퍼는 결국 불멸의 초등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박수는커녕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받고 알프스라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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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1> 에드워드 윔퍼(1840~1911)
짧은 기적 긴 방랑 '알프스의 고독자'… 불가능의 상징 '마터호른' 초등 하산길 비극 여파로 세계 유랑… 산·글·그림과 외로운 일생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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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터호른에 처음 오른 스물 다섯 살 무렵의 청년 윔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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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윔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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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터호른 초등의 감격을 표현한 윔퍼의 동판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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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윔퍼가 제작한 동판화‘마터호른 낙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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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호른(4,477m)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 아니다. 심지어 알프스 지역으로만 국한해서 보더라도 마터호른보다 높은 산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지구 상에 어떤 산들이 존재하고 있는지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알프스가 ‘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 결코 오를 수 없는’ 산이 바로 마터호른이었다. 거의 예각 삼각형에 가까운 날카로운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다른 위성봉들을 거느리지 않고 있어 그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산이었다.
현대 등반사에서 단 하나의 이정표를 꼽아야 한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에드워드 윔퍼(1840~1911)의 마터호른 초등(1865년)이다. 이 기념비적 등반의 주인공이 당시 나이 불과 25세의 앳된 젊은이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그는 여느 등반가와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등산을 일삼아온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20세 때 처음 이루어진 알프스 방문을 이렇게 회고한다. “영국의 어느 출판사가 내게 알프스의 명산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나는 등산이라곤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 산을 본 적도 없고 하물며 산에 오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 20세 때의 첫 여행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당시 그가 화가로서 참여했던 등반은 영국산악회가 이끌었던 알프스 몽펠부 원정이었다. 원정은 실패했지만 윔퍼는 훌륭한 그림을 그려냈다. 이로써 그가 맡았던 임무는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경계선 밖으로 뛰쳐나간다.
이듬해 화가로서가 아니라 산악인으로서 다시 한번 몽펠부에 도전하여 끝내 그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당시 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흥분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제 그의 눈에는 ‘오르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는’ 운명의 산이 가득 들어찬다. 바로 마터호른이다.
윔퍼는 그 이후 5년 동안 마터호른에만 여덟 번의 도전장을 내민다. 말 그대로 청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이 산에 쏟아 부은 것이다. 그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풍찬노숙과 끝없는 좌절의 나날들. 그럼에도 도저히 잠재울 수 없는 비이성적인 욕망과 열정. 어쩌면 청춘은 무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1865년 7월 14일, 기어코 마터호른의 정상에 올라서고야 만다. 세계 등반사는 물론이거니와 윔퍼 자신도 이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윔퍼는 생애 최고의 영광과 가장 쓰라린 비극을 이 날 하루에 모두 맛본다.
당시 윔퍼 일행은 스위스의 회른리 능선을 통하여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이드 장 앙투안느 카렐 일행은 이탈리아 능선을 통하여 오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국과 이탈리아가 마터호른 초등을 놓고 격돌하고 있었던 셈이다.
윔퍼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일행이 먼저 정상에 닿은 것은 간발의 차이였다. 카렐 일행은 그들이 정상에 오른 것을 보자 그만 발길을 되돌려 버렸다. 윔퍼는 그 사실을 가슴 아파했다. “나는 카렐이 지금 우리와 함께 정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카렐이야말로 제일 먼저 정상에 설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비극은 당일 하산 길에서 벌어진다. 윔퍼 일행들을 하나로 묶었던 자일이 낙석에 의하여 끊어지는 바람에 그들 중 4명이 1,200m 아래의 빙하까지 추락하여 사망한 것이다. 등반사에서 ‘마터호른의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이 사건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사람들은 마터호른 초등을 찬양하기보다는 무모한 짓을 하여 사람을 4명이나 죽게 만들었다면서 윔퍼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윔퍼는 사고경위서를 제출하고 법정에 출두해야 했으며 판결과는 무관하게 끔찍한 여론재판에 시달려야 했다. 그 모든 과정들이 당시 25세의 앳된 청년에게는 몹시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윔퍼는 결국 불멸의 초등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박수는커녕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받고 알프스라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만다. 이제 용암처럼 타올랐던 청춘은 가고 기나긴 여생이 그의 앞에 남아있다. 그는 남은 삶을 보낼 무대로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 눈을 돌린다.
이를테면 방랑자 겸 산악인으로서의 삶을 택한 것이다. 그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과 캐나다의 록키 산맥 그리고 그린란드를 탐험한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바라보자면 엄청난 선구자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는 40세가 되던 해에 남미 에쿠아도르에 있는 침보라초(6,310m)를 초등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인류가 오른 최고봉으로 기록된다. 여행과 등반 도중 보게 되는 모든 것들을 세심하게 기록하기로 유명한 그는 ‘안데스 등반기’를 집필하여 영국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윔퍼는 뛰어난 산악인이자 세심한 예술가였으며 고독한 사나이였다. 그는 산에 오르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 이외의 세상사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온 그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66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진다. 만년의 그가 자신이 묻힐 곳으로 선택한 곳은 역시 알프스였다. 칠순을 넘긴 그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곧추 들어 마터호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증언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람들이 혹시 윔퍼씨가 아니냐고 물어봐도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그는 71세가 되던 해에 알프스의 샤모니에서 눈을 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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