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새재의 '새재' 뜻은...
삼각산의 삼이 '소(ox)인지 세(three)인지와 관련하여 몇번 글을 올린적이 있는데,
문경새재의 '새'가 조(Bird)라기보다는 사이(Between)의 뜻이 아닐까라는 짐작에 좀더 심증을 두게되는 기사 두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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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인제군 용대리와 고성군 토성면의 사이에 있는 고개 새이령.
새이령 또는 샛령이라는 고개가 있나 봅니다.
“진부령처럼 지루하지 않고, 미시령은 짧지만 까탈스럽고, 한계령은 경관이야 수려하지만 험악스럽고,
구룡령은 장쾌하지만 뭔가 무거운 느낌이 드는 반면 샛령은 너무도 부드러운 길” 이라고 근사하게 소개하고 있는 샛령은
5만분의 1지도에는 대간령(大間嶺) 또는 새이령이라고 하는걸 보면,
그 뜻이 새도 못넘는 고개가 아니라 산과 산 사이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 가까운듯.
2.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에서 양양군 서면 서림리 넘어가는 백두대간 고개 조침령
조침령은 쇠나드리 또는 쫓칠령이라고 불리는데. 또는 바람부리라고도 하고요, 바람이 불어들어오는 곳이라고 해서 바람부리라고 하겠죠.
즉 다시말해 산과 산 사이에 바람이 불어드나는 곳.
이 고개와 관련하여 날아다니는 새는 등장하지 않는듯.
쇠나드리는 '사이'로 나들이한다고 해서 그러지 않을까.
조침령은 새 ->조(鳥) + 고개 치( 고개 峙 ->발음이 침으로) + 령(고개 嶺 : 역전앞과 같은 구조)
쫓칠령은 조치령이 한글 이름인줄로 알고 동네사람들이 만들어낸 전설과 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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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령’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이름만큼이나 소박한 길입니다.’ 여름의 끝무렵 평택에서 보내온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도통 얼굴을 알리 없지만 보낸 이의 ‘옛길’에 대한 대단한 관심이 짐짓 짐작되는 그 편지는 ‘유년시절을 보냈던 강원도 인제의 고갯길 하나를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용건을 먼저 밝히고 있었다. 30여 년 전 그향 고향인 용대리에서 뱀 잡고 약초 캐러 다녔다던 그는 ‘옛길’이란 타이틀에서 기억 속의 그 고개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가 말한 ‘샛령’은 그러니까 5만분의 1 지형도에 ‘대간령(大間嶺)’ 혹은 새이령이라 표기되는 백두대간 고개 바로 그것을 가리켰다. 인제군 용대리와 고성군 토성면의 경계. 고개는 미시령에서 대간을 따라 서북 방향을 향해 5.6킬로미터 가량 활시위처럼 휘어져 간 곳이다. 고개라고 하지만 백두대간 상이니 예사 고개가 아닐진대 이어지는 편지 내용은 이내 이런 걱정을 일시에 지워버렸다. “진부령처럼 지루하지 않고, 미시령은 짧지만 까탈스럽고, 한계령은 경관이야 수려하지만 험악스럽고, 구룡령은 장쾌하지만 뭔가 무거운 느낌이 드는 반면 샛령은 너무도 부드러운 길”이라 써놓고 있었다. 필시 그는 강원도 고갯길에 훤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샛령의 유순함과 친근함을 이토록 회화적으로 전달해줄 수 있단 말인가. 1960년대까지 왕래하던 길
강원 북부의 동서를 연결하는 고개라면 한계령이나 미시령 진부령이 꼽힌다. 모두 험준한 백두대간 고개라는 점이 동일한데 동서 고개의 통로가 차량으로 넘을 정도로 관광도로화되고 수월해진 것은 역시 1971년 12월 한계령 길이 포장되면서부터다. 미시령은 조선시대 성종때 도로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워낙 지형이 험해 폐쇄와 개통을 반복해 왔던 곳이고 진부령 역시 이때까지 비포장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한계령이 각광받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로부터 진부령이 포장된 것은 13년 뒤인 1980년대 중반이고 이 중반이 넘도록 미시령은 또한 비포장의 세월을 보냈다. 적어도 이 한계령 길이 개통되기 전에는 동서간 이어주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새이령밖에 없었다고 현지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얘기한다. 그런 새이령이 길의 족보에서 사라진 것을 두고 편지의 주인공은 ‘외려 순전히 너무도 부드러운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져갔다’며 안타까운 심정만 토로했다.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한의 북단에 속하는 이 곳이야말로 가을이면 단풍 행락객으로 도로가 미어 터질 정도로 단풍 관광지로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그런데 혹여 들뜸으로 자초될 실망을 경계라도 하듯 길 떠나는 날 가을비가 내렸다. 허나 이미 단풍은 미시령 언제리까지 당도해 있었다. 새이령 들머리인 창암마을을 향해 미시령 고개길을 거슬러 달리는 동안 언제 그칠 지 모르게 쏟아지는 빗 속에서도 이미 불 붙은 단풍의 기세는 그칠 줄 몰랐다. 15년전쯤 서울 마장동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진부령 행 직행버스를 타고 창바위에서 내려 미시령까지 비포장길을 걸어 오르던 옛산행의 한 장면도 잠깐 떠올랐다. 옥미정이라는 간판을 내건 민박겸 음식점 앞에 차를 세웠다. 주인은 새이령 들머리가 일행이 이미 지나쳐온 아래쪽이라며 일러준다. 그리고 던진 한 마디. “마장터 가시게요?” 새이령으로 가는 길손들은 들머리인 창암마을로 모여들었다. 지금이야 가구 수는 아스팔트길 주변에 보이는 몇 채뿐이지만 마을에는 주막집이 있었고 개울을 거슬러 오르면 그곳에는 한때 말이나 시인묵객들이 머물렀던 마장터가 있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에겐 새이령 길이 어디냐고 묻기보다는 마장터가 어디냐고 묻는 게 대답을 빨리 얻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지금도 그곳엔 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정보까지 덧붙여 알려주는 것이다. 장 보러 나갈 일이 없었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틈을 타 계곡을 건넜다. 새이령 옛길이 계곡을 따라 이어졌다. 빗물에 젖은 단풍은 더욱 현란하고 선명한 빛을 띠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마다 일행의 옷이 젖어드는 속도만큼이나 점점 더 황홀한 단풍 숲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장터에는 한때 40호가 넘는 사람이 살았던 곳. 편지글에 따르면 지금부터 30년 전만해도 집터마다 잡초가 무성했고 몇 가구 남아있는 화전민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바로 그 한계령 도로가 생겨날 때쯤 새이령의 통행 인구는 전멸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장터에 이르기 전 중간 고개인 소간령을 넘게 돼있는데도 지형도와는 달리 길은 도무지 오르막이 나타날 기세가 없다. 계곡을 오른쪽 왼쪽 여덟 번쯤 건넜을까 마침내 길은 고대하던 비탈로 향하고 있었다. 지그재그로 오르던 일행 앞으로 빨간 지붕인 듯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마침내 마장터 민가에 온 것인가! 생각했던 일행은 그것이 곧 단풍나무 군락임을 알아차리고 외려 감탄사를 터뜨렸다.
소간령은 그저 언덕인양 싱겁게 넘어가고 있었다. 군사용일 듯한 자그마한 안테나가 서 있는 소간령을 넘어서 내려가자 이내 신선봉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개울이 되어 발목 께에서 흘러간다. 물가에는 산부추와 투구꽃 군락으로 다정한 보랏빛이다. 철사로 엮어놓은 통나무 나무를 건너니 빗줄기처럼 곧게 뻗은 낙엽송 지대다. 바늘 같은 잎도 기둥도 물을 머금어 파랗고 짙은 갈색이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는 수직의 푸른 숲길. 옛길은 계곡과 잠시 이별하고 언제 끝날지도 모를 것 같은 곧은 숲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잡초가 허리께만큼 자란 묵밭이 눈길을 이끄는 사이 나즈막한 사립문이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마장터였다. 장터라도 설만한 공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간혹 단풍나무가 듬성듬성 불그레한 이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웃마장터 주막집의 무너진 돌담
마장터에는 두 명의 남자가 살고 있었다. 집은 두 채. 땅 주인인 백승혁씨(50세)의 것과 심마니노인이라 불리는 정?기씨(60세)의 귀틀집. 백씨는 외출중이고 정노인은 점심을 먹고 있던 차였다. “옛날에는 이곳에 없는 게 없었어요. 함지박공장에 말발굽 파는 곳까지 있었다니까. 바닷가에서 소금이나 생선을 지고 다니는 상인들이 수시로 넘어다니니까 이 골짝 사람들은 장 보러 나갈 일이 없었어요. 원님도 이 길로 넘어다녀 고갯마루가 원터였어요. 오죽하면 저 위 웃마장터에 주막집까지 있었을까.” 정노인에 따르면 그가 살고 있는 이곳은 아랫마장터, 새이령 고개 아래는 웃마장터라 불렸다. 일행도 옛 주막거리에 왔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 점심 찬거리를 꺼내놓으니 단풍구경에 잊었던 시장기가 몰려온다. 그새 비가 좀 불어났다. 계곡의 징검다리는 머리만 남겨둔 상태고 건너다보면 두발 중 한 발은 물에 적시기 십상인 정도. 그러나 일행 중 어느 누구도 그만두고 싶은 기색없이 즐겁게 다시 길을 나선다. 계곡은 지그재그로 길은 곧게 흘러간다. 물을 건너는 횟수가 늘어갔고 숲에는 이제 단풍비가 내린다. 습기가 찬 뿌옇게 된 카메라파인더에 비친 일행의 모습은 흡사 과거 속의 길손일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무너진 돌담을 지나 가을비 맞는 토끼길을 밟고 새이령에 오르니 운무가 가득하다. 제사 지내러 장 보러 소금 구하러 재 너머 다니던 백두대간 고개 새이령. ‘준령을 넘는 것이 작은 동산을 넘는 듯하다’는 건 괜한 과장이 아니었다. 도원리로 하산을 서두르는 김부래 기자의 한 마디. “지금껏 다닌 옛길 중에 최곤데.”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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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개울나들이와 단풍숲 산책이 황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창암마을에서 시작해 새이령(5만분의 1 지형도에는 대간령으로 표기)까지 약 5킬로미터, 고개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 마을 임도를 만나는 곳까지 약 2.5킬로미터, 임도를 따라 마가지 약 4킬로미터로 하루 산행으로 가능하다. 새이령의 특징은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는 완만하고 부드러운 길과 고갯마루까지 가는 동안 만나는 15개 정도의 자그마한 개울나들이, 10월 초면 만산홍엽을 이룰 정도로 빨리 찾아오는 단풍이 자랑거리다. 새이령은 이것이 과연 백두대간 고개인가 할 정도로 완만하고 부드럽다. 계곡을 거슬러 오르다가 중간 고개인 소간령을 넘어 새이령까지는 숨이 차지 않을 정도로 걷기 편안한 소로길. 반면 새이령을 넘어 고성 땅으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니 고개를 유유자적 거슬러 오르는 맛을 느끼려면 용대리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게 좋다. 미시령과 진부령 방면이 갈라지는 용대리의 매바위 앞 삼거리에서 미시령 쪽으로 약 1.5킬로미터 가량 오른다. 왼쪽으로 가게 <박달나무쉼터>를 지나면 <신선봉 농수특산물 할인점>과 <덕장 직영 황태 도매 소매> 간판을 단 가게가 나오는데 이 곳이 새이령 옛길이자 신선봉 산행 들머리. ‘속초 24km’란 안내판이 있는 곳이다. 등산로는 건너편으로 보이는 사격훈련장 앞으로 나 있으므로 징검다리로 건너야 한다. 소간령까지 계곡을 끼고 오른다. 소간령을 넘어선 다음 이깔나무 숲을 지나 너르고 평평한 지대가 나오면 이 일대가 옛 마장터다. 마장터에는 농가가 있고, 농가를 지나 7∼8번의 개울나들이를 해야 새이령에 올라선다. 소간령을 제외하고는 줄곧 개울과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며 새이령까지는 특별히 길 잃을 만한 곳이 없다. 새이령에서 도원리로 하산하는 길은 급경사길. 35분 가량 계곡을 끼고 지그재그로 난 급경사 길을 내려서면 도원리로 난 임도를 만난다. 마을까지는 약 4킬로미터다. ![]() | ||
새이령 옛길 입구 창암까지 다니는 대중교통편은 없다. 인제나 원통에서 진부령행 버스를 타고 삼거리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46번 국도의 미시령 진부령 방면이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미시령쪽 59번 지방도를 타고 약 1.5킬로미터 가면 된다. 새이령 옛길 들머리 주변에 숙식할 곳이 많지 않다. 들머리 입구에서 미시령쪽으로 200여 미터 올라가면 옥미정(☎033-462-7606)과 선녀와나뭇꾼(☎033-462-3957)이 있다. 두 곳 모두 숙식이 가능하며 황태찜, 토종닭, 닭도리탕을 비롯해 마가목주나 머루주 등을 맛볼 수 있다. 또한 일대에는 산나물을 비롯해 명란, 황태, 오징어 등 농수산 건어물을 취급하는 상점도 서너 곳 있다. 도원리에 민박 가능한 집이 10곳 가량 있다. 맨 윗집 영민네(☎033-632-3321)를 비롯, 살구나무집(☎033-631-7723), 황소집(☎033-632-5811), 물레방아집(☎033-632-4270), 심마니할매집(☎033-631-8995) 등. 5만분의 1 설악·간성 http://www.mountainkorea.com/c ··· 3D7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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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리에 들어서니 공기부터 달라졌다. 국내에서도 몇 남지 않은 청정구역으로 손꼽히는 곳. 방동리와 진동리를 거슬러 오르는 동안 개인산과 응복산∼단목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울창한 수림이 뿜어내는 신선한 물을 들이킨 방태천은 일대의 공기를 맑고 또 맑게 정화시켜 놓고 있다. 그 공기를 들이키며 연둣빛 이파리들은 시시각각으로 몸을 부풀리는 중이고. 진동리 가는 길은 안개에 휩싸여 있다. 마치 저 〈무진기행〉의 어느 구절처럼 ‘적군처럼 진주해오는’ 안개 더미였다. 그 안개를 뚫고 옛 현리 사람들이 넘던 양양장 길을 간다.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에서 흔들리는 동안 안개 속으로 사라진 마을, 딸랑거리는 달구지 방울소리를 더듬어본다. 달구지가 지나다녔을 우마찻길 가로 갈기조팝나무 군락이 드넓다. 흰 드레스를 차려입은 신부처럼 화사한 꽃잎이 소복하게 덮인 나뭇가지가 흐느적거린다. 방태천 옆으로는 깃털이 다 떨어져 핼쓱해진 억새들이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바람이었다. 소도 날려버린다는 ‘미친’ 바람은 아니지만 어느새 일행은 조침령 언저리에 당도한 것이다. 때를 맞춘 듯 눈앞에 자욱한 안개사이로 ‘쇠나드리교’라 적힌 입간판이 서 있다. 진동2리의 쇠나드리였다. 바람부리는 주막거리였다 쇠나드리의 딴이름은 바람부리다. 바람부리는 조침령 가는 주막거리였다. 기린면 가운데서도 현리나 방동리 또 진동리에서도 설피밭 아래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양양장을 보러갈라치면 이 바람부리에서 한 달음이면 넘는 조침령길을 택했다. 조침령길을 무시로 넘어다녔다는 박태수씨(47세)는 쇠나드리교에 조금 못미친 방태천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도회지에서 찾아오는 동창생을 마중하러 나간다며 트럭을 몰고나가다 그가 한 말을 빌리면 조침령은 “바람부리에서 서림까지 45분이면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빠른 길인 만큼 양양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으니 그의 말마따나 “밥을 싸서 조침령 너머 반젱이의 돌 밑에 넣어두었다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점심으로 꺼내 먹곤 했다”는 말은 괜한 과장이 아닐 터이다. 게다가 도보가 대부분의 이동 수단이었던 시절, 걷는 속도라면야 지금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빨랐던 시절이었으니까. 일행은 쇠나드리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골짜기 입구에 있다는, 김우철씨 네의 옛 주막집을 찾아간다. 옛 주막집 부엌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이 집 역시 최근 진동리의 개화기를 앞두고 황토방을 짓는 등 단장중이었다. 진동리에는 곳곳에 이런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한전의 점봉산 양수댐 건설 공사로 진동리로 드는 길 중간중간이 포장이 된 데다 서림과 진동리를 연결하는 새 조침령 지방도가 개설될 준비를 마친 상태다. 그러니 폭우나 폭설이라도 내리면 여지없이 발목이 묶이고 말았던 진동리는 ‘고립’의 굴레를 속시원히 던져버릴 기쁜 시대가 머지 않은 것이다. 애통한 것은 청정구역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고 오염된다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공사중인 황토방 오른쪽 골짜기로 든다. 황토방집 뒤를 돌아오르는 옛길은 산죽이 어른의 가슴께까지 자란 등성이로 나 있었다. 앞사람이 보이지 않아 그저 서걱이는 소리만 들으며 걷고 있는데 어느새 아침 나절 안개에 젖은 산죽을 헤치고 가는 동안 옷은 순식간에 흙탕물 묻은 빗자루로 쓸어내린 듯 만신창이가 된다. 전망이 트일 법한 능선에 마침내 올라섰지만 사방은 구름 속에 잠겼다. 오래도록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옛길에는 산죽이 무성히 자라 어디가 길인지 숲인지 알 수 없다. 허나 이번 옛길 산행을 위해 일전에 미리 답사까지 한 이상곤씨(44세, 도봉백두산악회)는 늘상 다니는 길처럼 스스럼없이 앞장서간다.
그래 산죽을 제끼고 속을 들여다보니 용케도 그 안에는 실낱같지만 또렷한 옛길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수십년 동안 오고간 발자국의 흔적은 그리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일행중 키가 가장 커 산죽 위로 머리를 내민 태백의 정이호씨(61세, 태백한마음산악회)와 야생화를 촬영하러 왔다가 취재팀과 동행하게 된 김건래씨(28세, 한국생명공학연구원)가 둘러멘 삼각대를 이정표 삼아 한달음에 조침령에 올라선다. 조침령을 전후한 능선은 백두대간에서도 오르내림이 심해 힘들기로 악명 높은 구간.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낱 잊혀진 고개일지언정 이곳에 나붙은 형형색색의 표지기를 보면 저절로 백두대간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고개는 주변의 악명 높은 산세 때문인지 덩달아 ‘좇칠령’이라는 애매한 이름도 얻기도 했는데…. 60년대만 해도 진동분교가 본교였을 정도로 진동리에는 제법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니 집안 일이 생기거나 명절 때마다 오죽 이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을까. 박태수씨가 일러준 고개에 있었다던 돌무덤은 무성한 산죽과 억새에 덮여버려 찾을 수가 없다. 대신 고개에는 파릇하게 돋아난 잎 사이로 은은한 아이보리색의 은방울꽃이 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다. 조침령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한계령에 다다르기 전 북암령과 단목령 등 2개의 고개를 더 지나간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고개가 모두 양양장을 가던 고갯길이라는 것. 특히 인제읍이나 현리 혹은 귀둔방면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고갯길 통로였다.
이중 북암령은 거리는 멀지만 소도 끌고 넘을 만큼 길이 완만하고 편해 가장 많이 이용되었고, 단목령은 오색으로 곧장 내려가는 가파른 길을 따라야하니 급한 용무가 있거나 건각들이 선호하던 지름길이었다. 점심이나 먹고갈 겸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이상곤씨가 “우리집에 가서 먹으면 좋은데… 이 백두대간을 따라 단목령까지 가면 바로 우리집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가 사는 곳은 단목령에서 진동리로 10분 정도 내려가다 만나는 첫집인 오두막집. 단목령에 있는 ‘檀木嶺’이라 새겨진 예쁜 목각 안내판도 그가 손수 만들어 세워 놓은 것인데, 이씨는 자신의 집을 ‘설피민국’이라 부른다. 이씨가 진동리에 정착한 지는 올해로 6년만.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우연히 진동리를 보게 된 후 스무 차례 이곳을 답사한 끝에 살기로 결정했다”는 그는 이제 진동리 강선리 곰배골 등 점봉산과 백두대간이 빚어놓은 이 오지의 골짜기는 물론 ‘숨은골’의 비경도 보았을 정도로 ‘점봉산인’이 다 되었다. 백두대간 이야기며 야생화 얘기며 5월 말이면 야생화 천국으로 변하는 곰배령 등 얘기꽃을 피우다보니 어느새 고개에 도착한 지 시간 반이 훨씬 넘었다. 여직 구름은 조침령 위를 서성거리고 있고 일행은 3시가 다 되어 서림으로 향한다. 골짜기로 내려서자 온통 노란 세계다. 발목께를 덮을 정도로 자란 동의나물 군락지대였다. 나뭇잎들이 보드라운 연둣빛을 내며 골짜기는 봄의 절정에 와 있다. 봄의 서정이 이런 것인가. 일행들이 느긋하게 다투듯 핀 꽃들을 감상하는 동안 김건래씨는 사진 찍으랴 연구용으로 사용할 꽃 수술을 채집하느라 바삐 움직인다. 산판길 흔적을 따라 서림 마방터로 오래전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나뭇잎이 골짜기를 소복하게 덮고 있었지만 사람의 발자국이 지나간 흔적만은 또렷하니 길 찾는데 어려움이 없다. 햇살이 비쳐들자 골짜기가 연둣빛 차양을 드리워놓은 양 화사해지니 마음까지 환해진다. 오염원이 있을리 만무한 이런 계곡을 두고 ‘청정구역’이란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이름모를 작은 폭포를 감상하며 넓은 암반이 펼쳐진 계곡을 지나자 축대가 무너져내린 산판길이 나왔다. 숲은 사람이 힘들이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알맞게 우거져 있다.
20여년전에 생겼다는 이 산판길로 나무를 간벌해낸 덕분일까. 낙엽 더미를 훑고 가다가 호젓한 숲속길이 나타나다가 이내 또 계곡을 건너기도 한다. 고개서부터는 줄곧 내리막길이지만 걸어도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길이 조침령 내리막길이다. 나물취 곰취 어수리 당귀 등 싱싱하게 자란 산나물이 미각을 자극한다. 멀찌감치 골짜기 입구의 하늘이 보인다. 쉬며 놀며 내려온지 1시간 40분 가량. 벌통 2기가 서있는 합수점을 지나자 집터가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길은 오솔길처럼 수월해졌다. 골짜기를 혼자 산책나온 산불감시원 김성재씨(68세)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장화를 신고 빨간 모자를 눌러쓴 그는 다행스럽게도 마을 이장까지 지낸, 고갯길 내력에 훤한 사람이었다. 김씨에 따르면 골짜기 곳곳에는 화전민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피난처로도 곧잘 이용되었다. 그는 또 조침령이란 이름에 관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른 아침 한 산적꾼이 고개를 넘기 위해 아침거리를 해결하려 했는데 서림 쪽에서는 쇠나드리로 넘어가서 먹으라 하고, 쇠나드리쪽에서는 고개 넘어 서림에 가서 먹으라 하며 내쫓았다고 해서 ‘쫓칠령’이라 불렀습니다. 그만큼 옛날에 먹고 살기 힘들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둥글둥글 감겨올라간 칡나무 넝쿨 주변에 둘러선 일행은 때마침 잘 만났다는양 재미있는 옛 얘기를 풀어놓는 김씨에게 붙들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진동리 새 조침령 임도 입구에 세워둔 차를 가지러 갈려면 서둘러야 했다. 동네 물 저장탱크를 지나니 이내 마을이다. 옛 마방터와 마주보고 있는 임태수씨 집 앞에서 노인과 이별을 하고 국도로 나선다. 마을은 더없이 한적하다. 후천 가에 터 잡은 이 양양의 오지. 이 골짝에 구룡령을 넘어 외지로 통하는 포장도로가 뚫린 지 제법 되었지만 휴가철을 제외하면 차는 가뭄에 콩 나듯 다닌다. 번잡스럽지 않은 곳. 그것이 서림 사람들이 아직 옛 얘기를 간직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일지도 모른다.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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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침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에서 양양군 서면 서림리 넘어가는 백두대간 고개로, 진동리와 방동리 일대 주민들이 양양장을 보러 다니던 길이다. 산행은 현리에서 방대천을 따라가다가 포장도로가 끝나는 맞바우부터 시작해도 되고 비포장길을 좀더 달려 진동2리 쇠나드리교 앞의 쇠나드리마을에서 시작해도 된다. 취재팀은 쇠나드리교를 건너 우회전해 들어가 옛 주막집인 김우철씨집에서 시작했다. 쇠나드리에서 조침령까지는 20분 남짓, 이후 서림까지는 내리막길. 쉬며 놀며 가도 2시간 30분이면 넉넉하니 쇠나드리부터 서림까지는 하루산행으로 충분. 다만 쇠나드리쪽 산행 거리가 짧은 게 아쉬우면 서림쪽에서 산행을 시작해도 좋다. 쇠나드리에서 조침령 옛길은 김우철씨 집에 한창 공사중인 황토방 오른쪽 골짜기로 나있다. 옛길은 골짜기를 들어서자 곧 왼쪽의 산죽밭 능선 사면으로 올라붙게 나 있다. 앞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산죽이 높이 자라 있지만 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조침령에는 길손들이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대신 5월초라면 한창 꽃을 틔우고 있는 은방울꽃 군락을 볼 수 있다. 백두대간 표지기가 즐비한 조침령에서 서림으로 내려가는 옛길은 올라온 길에서 직진하는 길. 서림으로 내려가는 계곡은 동의나물과 갓 자라난 나물과 야생화 군락지가 있어 신록의 나라를 연상케한다. 계곡은 오염원이 전혀 없는 원시 상태.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군데군데 축대가 남아있어 일제때 만들었다는 산판길의 흔적이 또렷하다. 집터가 나타나면 거의 계곡을 다 내려온 상태.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서 맨 처음 만나는 집이 임태수씨 집. 이 집 왼쪽 계곡 건너편이 옛 마방터. 집을 나서면 구룡령과 양양을 연결하는 56번 국도. 산행은 이곳에서 끝이 이 난다. ![]() | ||
진동리로 가려면 대중교통편이든 승용차든 인제군 기린면 현리가 기점이다. 대중교통은 일단 인제까지 가서 06:50부터 19:40까지 있는 완행이나 직행버스를 타고 현리까지 간다음 현리버스터미널(☎033-461-5364)에서 진동리 행 버스로 갈아탄다. 진동리행 버스는 6:50 9:30 10:40 13:30 15:20 17:30 19:20 하루 7번. 종전에는 버스가 갈터까지 다녔지만 포장이 연장되면서 맞바우까지도 운행되고 있다. 진동리가 목적지라면 맞바우까지 가는 버스를 골라 타는 게 좋다. 요금은 1,230원. 승용차의 경우, 31번 국도가 지나는 현리의 방대교 삼거리에서 418번 지방도를 타고 방동리를 지나면 진동리가 나온다. 포장은 맞바우까지만 돼 있다. 양양이나 강릉, 삼척 등지에서는 한계령을 경유하지 않고 진동리로 가는 길이 생겼다. 점봉산 양수댐 공사로 양양군 서림리와 진동리를 연결하는 418번 지방도가 그것. 아직은 비포장이라 4륜구동차라야 넘는 게 권할 만하고 서림에서 진동리까지 40분 가량 걸린다. 쇠나드리 쇠나드리교 주변에 민박집이 네 곳 있다. 쇠나드리교 직전 방태천 건너편에 박태수씨(☎463-7306) 집. 쇠나드리교를 건너서 설피농장(☎033-463-1159 이상우), 민박집(☎483-5440), 옛 조침령 들머리의 주막집이던 김우철씨(☎463-7900) 집. 쇠나드리교에서 설피밭쪽으로 들어가다가 양양으로 넘는 418번 지방도 삼거리 주변에 산들바람(☎463-5192), 나무꾼과 선녀(☎463-5757). 좀더 들어가 상부댐 입구 안내판(점봉산 11km,상부댐 3km)을 지나있는 설피산장(☎463-8153), 설피교를 지나 하늘찻집(☎462-2919), 단목령에서 20분 거리의 설피밭 이상곤씨집(☎463-4289) 등지에서 묵을 수 있다. 5만분의 1 설악 속초 현리 연곡 http://www.mountainkorea.com/c ··· 3D6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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