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은 참 대단한 산입니다. 이유인즉슨....

북한산은 참 대단한 산입니다.

2000미터 넘는 산은 한군데도 없는 나라에서 8000미터 14개 등정자를 세명이나 보유한 한국 산악인의 모암은 북한산, 인수봉이다.....라는 등등  천편일률적인 글투는 상당부분 진실을 내포하고  있지만,  한시절, 한국의 대표 산악인, 전문산악인들의 전유물이었던 북한산을 좀  해방시켜서 볼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 북한산 어깨에 놓였던 부담좀 줄여 줍시다.~

북한산이 참 대단한 산이라는 건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1. 수많은 산행기들이 해마다 쏟아져 나옵니다.
1개 산을 주로 해서 씌여진 산행대상지는 북한산이 유일할 듯 합니다.

2. 개개인의 산행 스타일은 각기 다릅니다.
줄기차게 설악산을 오르는 사람, 국립공원을 가는 사람 등등
그렇지만 북한산만큼 다양한 산행기록을 가진 사람은 드물것입니다. 북한산 몇천회 등산. 인수봉 몇회 등반. 냉골릿지 몇년 산행...

3. 수많은 인터넷 산악회 중에 산이름을 딴 게 많습니다.
그중에 회원수나 활동력을 보아서 "북한산"이름을 가진 산악회들과 비할 수 없습니다.  토요 북한산, 북한산 연가 등의 산악회가 대표적입니다. 단순히 천만 시민이 사는 서울에라서일까요?

4. 산길중에 북한산만큼 샛길이 많은 곳이 없습니다.
샛길이 많다는 것은 산이 낮다거나 근교산이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이 산에  눌리지 않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등에서는 산이 허여하는 길따라밖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산의 산행기는 상대적으로 엄숙합니다. 금강산이 대표적이죠. 샛길이 많은 산은 사랑을 받는 산입니다.

5. 이름난 어떤 산들은 산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지뢰밭이 많습니다.
비유하자면 베트남 전쟁 때 신작로를 벗어난 곳은 베트콩의 길인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북한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산행해서이기도 하지만, 화장실도 적당한 거리에 있고 등등이겠죠..
얼핏 듣기에 설악산 오색약수에서 대청봉 가는 길에 화장실이 한군데라고 하던가요...


북한산은 개개인이 보고 알고 느끼고 싶어하는 것을 충분히 제공하는 금맥, 요즘말로 하자면 블루오션인 듯 합니다.

아래는 북한산에 대한 개략사로 짧지만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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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북한산 등반사


(김장호 선생의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중에서)


요즈음에야 다람쥐도 보기 힘든 북한산이 1백년 전, 아니 50년 전 만해도 심산 유곡이었다면  놀랄 사람이 많을 것이다.불과 30년전 그러니까 1950 연대 후반,그 전 까지만 해도 후미진 산자락이었던 수유리,가오리에 이웃에 살던 노인은 그가 소시적에 북한산에서 분명히 호랑이를 보았다고 말했다. 나도 1958년 겨울에 대성문 쪽에서 노루를 보고, 또 65년의 언젠가는 대동계곡지릉에서 마지막 늑대를 만났었다. 심산유곡이란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없다시피 한 그윽함이 첫째 요건이지만, 그것이 산짐승의 서식여부에서 오히려 쉽게 판가름되는 것이라면, 그 무렵 북한산은 심산유곡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문헌으로 말하면 영조21년(서기1745년)에 엮어진 북한지(北漢誌)에는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폈다고 하니, 이것이 북한산 등반의 최초 기록이 된다.그것이 사실 이라면 북한산 초등은 고구려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셈이지만, 그 옛날에 무슨 재주로 암벽을 타내었을까 싶다.그것은 오히려 북한산 어느 봉우리에 올랐던 일을 두고 나중에 그렇게 빗대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도 백제 침류왕 때 (서기384년)에 승려 10명이 북한산에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유럽에서도 그렇듯이 등산의 시초가 더러 종교적인 신심에 의한 것이라면,지금도 북한산에 남아있는 도선사,문수사,일선사,상운사,승가사,진관사,태고사,봉성암,도성암, 등을 비롯 하여,이름만 전할 뿐인 보광사, 중흥사,원각사,진국사,용암사 등을 거점으로 하는 사찰 사람들의 북한산 등반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북한산은 명산 다운 면모로 하여 일찍부터 사람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중 확실한 것은 역시 비봉에아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이다.그것은 진흥왕 16년(555년)의 일이니,도보로 올랐던지 말을 탔던지는 몰라도,지금부터 1432년 전의 일로서,그것도 한강 하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 한 지점에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단걸음에 올라섰을 리 없고, 산마루를 누비며 그 자리를 찾아 헤맸을 것이라 생각하면,그것이 군사적 정치적인 동기라 하더라도, 북한산 등반기록으로는 획기적인 것이다.


한양 도읍 이후 세종은 즉위 15년(1433)에 그의 신병이 아무래도 경복궁터와 관계가 있다 하여, 그 해 7월15일에 황희(黃喜),신상(申商),김자지(金自知) 등을 삼각산 보현봉에 올려보내 산줄기의 그 맥을 살피게 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그러나 북한산이 지금 모양으로 전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숙종 37년(서기1711)의 산성 수축으로 돌아 간다. 백제 개루왕 때   (서기469?) 쌓았다는 토성 터 위에 국망,백운,원효,의상,용혈,증취,문수 등 여러 봉우리를 40여리에 걸쳐 연결하고,18척 높이에,둘레 9척, 세군데 장대를 세우고 14개의 문을 만들었으니, 그 새 더러는 허물어졌으나 그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의 모습인 것이다. 그로부터 성 안에는 앞에 적은 여러 사찰과 함께 군사시설로 훈련도감유영(訓練都監留營), 금위영유영(禁衛營留營), 어영청유영(御營廳留營) 등이 들어 앉아 산성경비를 맡았으니,북한산 등반사는 오히려 군사,국방사와 방불한 것이 된다.


이런 종교 군사적인 목적이 아닌, 온전한 등산 목적은 숙종33년 (1707) 음력2월, 그때 나이 27세였던 성호 이익(星湖 李翼)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의 문집 권(卷) 53에 있는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는 지금 읽어도 대강 그 루트를 짐작 하게 해준다. 그는 동행 한 사람을 데리고 1박2일 일정으로 동소문 친지집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4.19탑 앞을 지나 십이급(十二級)폭포를 거슬러 이 고장 노인들이 그 이름으로 부르는 수리탕굴을 타고 올라 조계사(지금 그 축대만 남아 있다)에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대동문앞 석가령을 넘어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은 멀리 바라보기만 하고 단념한 채, 발길을 돌려 문수암에거 점심을 먹고 보현봉에 올랐다가 세검정으로 내려와 창의문으로 돌아 오고 있다.


한편 고관들의 행차나 백성들의 산성출입은 구파발을 지나 대서문으로 드나들었음이 분명 하다. 이 산성 성문들 중 평지에 위치한 문이란 대서문뿐이기 때문이다. 또 북한산에 기대어 사는 마을들 이름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地)에 우이리(牛耳里),가오리(加五里), 산성리(山城里) 등이 보인다. 그 고을 사람들은 분명히 그쪽 산 자락을 헤쳐 북한산을 오르 내리며 동식물을 수렵.채집해서 생을 영위했을 것이다.


조선조 말기, 일제 초기에 별다른 기록이 없고, 쭉내려와서부터 비로서 북한산에 근대적인 등산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 한다. 그러다가 인수봉이 처음 그 정수리를 사람의 발을 올려놓은 것은 1926의 일이란 것이 공인된 기록 이다. 당시 경성 주재 영국총여사관의 부영사였던 C.H.아쳐라는 영국이과 임무(林茂)등이 자일 등 근대적 장비를 갖추고 암벽등반으로 인수봉에 오른 것은 서북면 C코스였다. 그후 1935년에 이르러 동남면 B코스가 김정태, 엉홍섭 등에 의하여 열리더니 다시 이듬해에 오우찌, 박순만 등에 의해서 동면의 A코스가 뚫렸었다. 일제 때 한국산악계는 대개 일본인  거주자들에 의한 조선산악회와 한국인 만으로 조직된 백령회가 서로 경쟁 하는 꼴이었는데, 이 B.A 코스의 개척도 바로 그런 구체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 현 백운산장과 인수산장 관리인 형제의 조부 이해문이 1924년에 백운대에 처음 올랐을 때, 인수봉 정상에 이미 불단( 佛壇 ) 석탑이 차려져 있었다고 전하고,또 25년에는 미국인 원한경 일행이 올랐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또 이해문의 아들 이남수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말부터 인수봉에는 묘한 징크스가 나돌았다고 한다. 그것은 1942년 담배소매상 김판산(전남출신 당시19세)이 친구 2명과,그리고 47년에 또 신당동 거주 소방수 정모(22세)형제 2명과 함께 후면에서 활락사(猾落死 ) 했으니 그것이 모두 4월 셋째 일요일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후로도 이 매혹의 한 장짜리 바위봉우리에 도전하는 사람들수에 비례하는 희생자는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알려진 바만 가지고도 1964년 10월 4일의 서울대법대생 2명, 71년 11월 28일의 7명,84년 4월 3일의 7명이 모두 이 바위에서 구르고 더러는 한습풍현상을 만나 희생당했다.


그러는 동안, 인수봉에 끌려드는 젊은이들은 그 바위벽의 골마다, 면마다에 볼트와 하켄을 두들겨 박았다. 그 결과 이제 와서 인수봉에 열리지 않은 면이 없다시피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인수봉이 온통 쇠꽂이로 뚫린 만신창이가 되어 마침내 그런 장비를 박아대지 않는 크린 크라이밍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수봉 뿐인가.30년전만 해도 창동에서 기차를 내려 방학동을 거쳐, 지금의 선운각 뒤 능선으로 붙거나,도선사 뒤로 빠져 산장 건너편으로 오르거나 하던 길밖에 없던 백운대 코스가 이제는 산지 사방으로 길이 뚫렸다.


수도 근교에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산이 서울의 북한산 빼고 또 있던가.77년 에베레스트 원정에 성공한 것을 기틀로 하여 일기 시작한 등산붐은 마침내 80년대의 레져붐을 타고 불붙어 북한산은 산이 아니라 놀이터로 화하여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높이로야 836M에 지나지 않지만, 그 청수함에 있어 달리 비길 데 없는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니, 조금은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그 흔해빠진 루트와 장비의 손쉬움으로 말미암아, 더더욱 쓰레기장으로 깔아 뭉게지고 말런지 그것은 그야말로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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