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과 그 뒤에 병풍같은 황매산 풍경 사진을 모아보았고,
곁들어 국보 제 5호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의 어줍잖은 비교 이야기를 먼저 올려봅니다.
좌측이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이고 우측이 법주사꺼입니다.
문화재청장 시절의 여러 불민한 일들 때문에 명성이 예전같지 않은 떨어진 유홍준씨는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을 두고서,
" 생김새도 다른 나라 사자처럼 사납지 않고, 털복숭이 삽살개 같은 친근미가 있다."라고 했고,
문화재청 홈피에서는 법주사 쌍사자 석등을 두고서
".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각기 '타인의 취향'이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저는 단언코 전자에 눈길이 더 많이 가고 정이 갑니다.
이유는 위와 같이 전문가적인 견해가 아니라 그냥 아래와 같은 제 개인적 느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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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사터는 황매산 자락인 모산재의 화강암이 병풍처럼 둘러선 사이에 있습니다.
같은 합천의 해인사와는 또달라 문화유산 답사하는 이들이 텅빈 '터'에 가득한 충만한 기운에 한결같이 탄복한다고 합니다.
돌을 통으로 깍아 멋들어진 계단이 인상적인 터 위에 천년을 내려온.
저는 이 쌍사자 석등, 특히 다리를 인터넷에서 처음 보는 순간, 너무나 익숙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 적절한 사진을 찾지 못해 아쉽지만,
쌍사자 석등의 사자 다리는 실제 사자의 다리가 아니라
"아기예수"와 같이 포동포동하고 토실토실한 아기의 다리를 재현한 걸로 보입니다.
찌뿌뚱한 이라도 울적한 이라도 한번 보면 마음이 씻어지는...
우리를 고양시키는...
황매산, 영암사 절터에 언제라도 뛰어노는 듯한...
언제든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성지에 어린 아기가 투영되어 있지 않다면 그곳은 성지가 아닐 것입니다.
천당 천국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기화요초 가득해도 어린 아이 웃음소리가 없다면
아기의 뒷태를 보여 줄수도 없고^^(왜냐하면 아직 찍지 못해서요.~~)
딱 이런 모습입니다.
엉덩이를 약간 뒤로 뺀, 오동통한.
언제든지 고개를 돌려 씨익 웃을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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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법주사 석등입니다.
통일신라시대때 작품이고 국보 5호라고 합니다.
영암사터의 그것과 비교하여 한눈에도 건장한 남자의 뒷태입니다.
옆모습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정은 영락없는 사천왕상입니다.
법주사는 신라의 변경지역도 아니었을텐데, 가람수호 등의 이유가 있었을까요?
자꾸 보다보니 사람들이 왜 볼 것 없는(?) 폐사지에 답사가는지 알듯도 싶습니다.
국보도 보물도 아닌 쌍사자 석등이 있어서 이곳은 빈터가 아닙니다.
대학에, 심부재언이면 시이불견이고 청이 불성이라고 있나 봅니다.
마음이 없으면 해인사에서도 보아도 보이지 않을 것이요.
마음이 없으면 팔만대장경이 들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니,
마음이 있으면 보면 보이고, 듣고자 하면 들리니 말이죠.
지금 영암사는 우렁차게 복원공사중인가 봅니다.
이소리 저소리로 가득하게 될겁니다.
그때 쯤이면 이 석등이 그만큼 초라해질 테고, 무언의 음성에서 나(아)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무설지설. 무법지법의 가르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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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황매산 암릉 모습과 쌍사자 석등의 여러 모습들을 여러 블로그에서 모셔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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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블로그
http://blog.naver.com/greatsm2001/120038402012,
http://neowind.tistory.com/235 ··· 2f235유홍준의 국보순례] [63]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기사를 읽으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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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국보순례] [63]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8세기 3/4분기,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우리나라 고전미술이 완성된 시기였다. 불국사·석굴암·에밀레종 등 건축·조각·공예 모든 분야에서 불멸의 문화유산들이 창조됐다. 고전미술의 본질은 전형(典型·typical type)의 창조에 있다. 앞 시기의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을 수렴하여 하나의 모범답안을 제시함으로써 이후 일어나는 모든 양식의 기준이 될 때 그것을 전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형이라는 것이 똑같은 양식의 되풀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전형에는 변화로 나아가는 길이 열려 있다. 석가탑이 탄생할 때 그 곁에 다보탑이라는 화려한 이형탑(異形塔)이 동반된 것과 같은 다양성의 보장이다.
불국사 석등이 하나의 전형으로 완성되자 여기서도 기발한 변주가 일어났다. 그것은 쌍사자석등의 탄생이다.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과 앞발을 맞대고 석등을 받치는 쌍사자석등은 보은 법주사(국보3호), 광양 옥룡사터(국보103호), 합천 영암사터(보물353호), 그리고 하반부만 남은 공주 대통사터의 쌍사자석등(국립공주박물관) 등 4기가 있다.
쌍사자석등은 두 마리 사자의 뒷다리와 앞발 사이를 공허공간(空虛空間)으로 깎아냄으로써 조각적으로 대성공을 이루었다. 보통 조각이라고 하면 양괴감(mass)을 기본으로 한다. 현대조각사에서 헨리 무어의 명성은 이런 공허공간의 이용에 있다. 그런데 1200년 전 우리의 석공들이 이 기법을 이처럼 능숙하게 구사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석등은 병풍처럼 둘러진 황매산의 눈부신 화강암 골산과 환상적으로 어울린다. 마치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높직한 석축 위에 홀로 우뚝하다. 생김새도 다른 나라 사자처럼 사납지 않고 털복숭이 삽살개 같은 친근미가 있다. 사자는 불교의 신성한 동물로 인도·중국·일본의 불교조각에 두루 나타났지만 쌍사자석등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통일신라 이전에도 없고 통일신라 이후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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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국토박물관 순례] 4.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기사를 읽으시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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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국토박물관 순례] 4.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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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히 버텨선 천년왕국 자존심 |
국토박물관 순례의 진수는 뭐니뭐니 해도 아무런 해설 없이 그 자체로서 예술적 감동을 불러 일으켜주는 문화유산의 명작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가슴이 설레며 깊은 감흥에 젖어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유물은 순례의 기쁨을 넘어 민족적 자부심까지 일으켜 준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黃梅山) 영암사터는 내가 고이 간직해온 답사여행의 비장처다. 20년전,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친구의 친구인 한영희(韓永熙)가 국립 진주박물관장을 지내고 있을 때 그는 내게 요담에 서부경남에 오면 꼭 영암사터를 들러보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 이듬해 늦가을, 절터앞 해묵은 느티나무 낙엽이 가랑비처럼 흩날릴 때 찾아간 영암사터는 마치 폐허에서 만나는 환상의 나라 유적 같았다.
영암사는 언제 창건되어 언제 폐사로 몰락했는지 알려주는 기록이 없다. 다만 용케 전해지는 '영암사 적연국사(寂然國師) 자광탑비(慈光塔碑)'의 고탁본(서울대학교 도서관)이 하나 있어 11세기 고려 현종 때 적연국사(932~1014)가 말년에 여기를 찾아와 조용히 입적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영암사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보물 480호), 쌍사자석등(보물 353호), 비석을 잃어버린 돌거북받침(보물 489호) 등 세개의 보물은 모두 9세기 하대 신라를 대표하는 명작들이어서 통일신라 말기 이 지방 호족의 발원으로 창건된 선종 사찰로 추정된다. 고려 때만 해도 나라의 국사가 주석할 정도로 이름을 얻었으나 아마도 조선 초 폐불 정책과 함께 오지 중의 오지인 이 절은 폐사되고 만 것 같다.
영암사터는 무엇보다 절집의 위치 설정, 건축 용어로 사이트(site)가 뛰어나다. 우리나라 절집들은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화순 쌍봉사처럼 깊은 산중의 절, 영주 부석사처럼 드넓은 조망을 갖고 있는 절, 부안 내소사처럼 아름다운 배산(背山)을 갖고 있는 절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데 영암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한 몸에 지녔다. 합천.산청.거창을 경계짓는 황매산 깊은 골, 모산재라는 화강암 골산을 배산으로 하고 높직이 올라 앉아, 겹겹이 물러나는 아득한 산자락을 바라보는 조망을 갖고 있다. 이 절집의 이름이 불교 용어를 택하지 않고 신령스러운 바위산을 이끌어 영암사라 했음도 이런 위치 설정에 있었을 것이다.
영암사의 가람배치는 황매산을 등에 지고 동서 일직선상의 3단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석축의 돌쌓기는 반듯한 네모돌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대못 모양의 팔뚝돌을 끼워 안으로는 역학적으로 힘을 받게 하고, 밖으로는 구조적인 튼실함을 갖고 있다. 그것부터 이 절의 건축에 얼마나 공역을 들였는지 남김없이 알 수 있는데 금당의 석단에는 4면에 모두 여덟 마리의 사자를 실감나게 돋을새김하였고, 불단 기초석에는 팔부중상(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장)을 정교하게 조각했다. 또 금당 계단의 난간은 가릉빈가(극락정토에 산다는 상상의 새)를 날개 달린 여인의 어여쁜 춤사위 모양으로 장식했다. 그 모두가 마치 황매산의 화려함에 결코 지지 않겠다는 조형의지로 보인다.
그런 중 황매산과 영암사의 아름다움을 둘이 아닌 하나로 묶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은 금당 앞 쌍사자석등이다. 화강암 통돌을 깎아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데 다리와 다리 사이, 팔뚝과 팔뚝 사이는 돌을 뚫어 공허(空虛)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로인해 입체감과 사실성이 뚜렷하고 사방 어디에서나 쌍사자의 몸짓을 읽을 수 있다. 그 조형적 구성력은 거의 현대적인 것이다.
20세기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가 현대조각에서 이룩한 최고의 공헌은 기존의 조각들이 매체의 양괴감을 나타내는 데 급급한 것을 벗어나 공허 공간을 창출했다는 것인데 여기 이름 없는 신라의 석공은 1천년 전에 이렇게 조각적으로 실현했던 것이다.
법주사의 쌍사자석등(국보 5호), 광양 중흥산성의 쌍사자석등(국보 103호)의 전통을 이어받은 영암사 쌍사자석등은 그것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절묘한 석축 때문에 더욱 제 빛을 발하고 있다. 금당의 석축을 쌓으면서 석등이 앉을 자리를 철(凸)자형으로 돌출시켜 아래쪽에서 보면 이 쌍사자석등은 높이 3m가 넘는 석축 위에서 마치 황매산 연봉들을 호령하는 대대장 혹은 교향악단의 지휘자 같은 당당함을 갖추게 된 것이다.
석등을 받치고 있는 석축 양옆의 돌계단은 통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깎아 여섯 단의 디딤돌을 발뒤꿈치가 허공에 뜬 채로 조심스럽게, 그리하여 경건한 자세로 오르게끔 했다. 그 기발한 발상을 보면서 직지사 성보박물관장인 흥선스님은 영암사터 답사기를 쓰면서 "밉살맞을 정도로 귀엽다"고 했다. 나는 이 무지개 돌계단의 곡선을 무어라 표현할 줄 몰라 그냥 예쁜 호(弧)를 그린다고 말하곤 했는데, 한번은 공과대학 교수가 내 강의를 들은 뒤 사인(sine) 12도의 곡선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영암사터 답사는 자연스럽게 금당 한쪽에 있는 조사당터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조사당터 양옆에는 한쌍의 돌거북비석받침이 있다. 이 역시 하대 신라와 고려 전기를 대표할 명품이다. 그중 하나가 적연국사 비석받침이고 또 하나는 이 절을 창건한 스님의 것이 분명하다.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올 때면 두 돌거북비석받침의 양식적 차이와 시대 판별법을 실험 실습하듯 강의하고 시험도 본다. 어느 것이 더 오래된 것일까? (정답은 안내판에 모호하지만 맞게 쓰여 있다.)
영암사터로 가는 길은 합천에서 삼가를 거쳐 가회로 들어가는 것이 원래의 길이지만 대통(대전~통영)고속도로를 이용하자면 산청 원지에서 들어가는 것이 빠르고, 낭만적으로 가려면 합천호를 끼고 산상의 호반길로 갈 수도 있다. 근래에는 거창 양민학살의 현장인 신원면 과정리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는 길이 뚫려 나는 주로 이 길을 이용한다.
이 길로 가자면 산청군 신등면의 단계(丹溪)라는 마을을 거치게 되는데 이 묵은 동네에는 순천 박씨, 안동 권씨의 고가(古家)가 예닐곱 채 있고 집집마다 단계천 냇돌로 쌓은 돌담길이 정말로 정겹고 예스럽다. 어떻게 이 깊은 산골에 이처럼 전통을 귀중히 간직해온 동네가 있을까 신기롭고 고맙기 그지없다. 마을 한쪽 초등학교는 세 칸 솟을대문이 정문으로 세워졌고 대문엔 '삭비문(數飛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배우고 익힌다는 습(習)이란 어린 새가 자꾸(數) 날갯짓(飛)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참으로 대단한 전통의 옛 고을이다.
언젠가 영암사터 답사 때 진주가 고향인 한 열성회원이 내게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경주.안동.해남.서산.양양 등 답사의 명소를 갈 때마다 내 고장엔 왜 저런 환상적인 답사처가 없을까 늘 주눅들어 왔는데 이제는 큰소리치게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서부경남 문화유산의 자존심이 여기에 있다."
<명지대 미술사학과.문화예술대학원장>
● 10월 31일자 23면에 실린 '국토박물관 순례-모리재(某里齋)와 거창 위령비'편 중 곽종석의 호 '면우'의 한자 표기 宇를 제작상의 실수로 傘宇로 잘못 표기했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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