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일제시대때 등산이란....


대동아 전쟁이 발발한 후인 1939년이면 어떤 시대인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 오피니언 메이커들에게(그러니까 취미를 갖고 즐길 줄 아는 계층)에게
등산이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글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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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시절에 등산한 얘기라....

등산은 당시 유한계급(?) 또는 모던보이들에게 격조있는 취미였던 것 같습니다.

당장 <여성> 1939년 3월호를 보면 그들이 나눈 이야기를 엿볼 수 있을 테고,
이에 그치는 게 아니라 1940년 전후의 잡지에 등산 또는 알피니즘에 관한 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처 : 스위트홈의 탄생-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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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에는 이인직의 혈의 누 일부를 싣고 있습니다.
혈의 누는 1906년 그러니까 한일병합이전 그가 45세때 쓴 소설입니다. 그중의 일부.

" ......
그런고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짐승같이 제 몸이나 알고 제 계집 제 새끼나 알고
나라를 위하기는 고사하고
나라재물을 도둑질 하여 먹으려고
눈이 벌겋게 뒤집혀서 돌아 다니는 것이
......

1906년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구절만 가지고 당시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요. 물론.
그러나, 더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 짐승같이 제 몸이나 알고 제 계집 제 새끼나 알고. 눈이 벌겋게 뒤집혀서......"




한일병합때 조선의 양반층이 목숨을 스스로 버린 이가 4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똑같이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일본이 45년 패망후 자결한 이는 과연 몇명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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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동아일보에 매천 황현선생의 기사가 나와 있네요.


내가 꼭 죽어 의()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국가가 선비를 키워온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이가 없다.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아니한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을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이 1910년 9월 10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자택에서 한일강제병합(1910년 8월 29일)을 통분해 아편을 삼켜 자결하며 절명시 4수와 함께 남긴 유서의 일부다. 그는 군주의 신하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대한 지식인(선비)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결함을 밝혔다.

매천은 전라도 광양현 서석촌에서 태어나 나이 스물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와서 당대의 젊은 문사들과 교류했다. 34세 때 생원회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급제했으나 정권의 부패를 개탄하며 벼슬길을 포기하고 구례로 내려가 제자 강학과 시문 창작에 전념했다. 허세와 위선을 혐오했던 그의 성격은 ‘매천야록’에서 의병운동까지 비판할 정도로 꼬장꼬장했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이 쓰시마 섬에서 단식 순국해 시신으로 돌아오자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가련타 어드메에 임의 뼈를 묻사오리”( ·고국유산허영벽 가련매골향하방)라 하였다.


http://news.donga.com/3/all/20100908/310396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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